대학교를 졸업하고 두 번 째 직장이었던 아동보호전문기관에 첫 출근 하던 날이 생각이 납니다. 검은색 바지에 하얀색 블라우스, 슬립온을 신고 있었는데 기관의 팀장님이 직원들에게 신입직원 소개를 한 뒤 기관 라운딩을 시켜주셨습니다. 팀장님께서는 대뜸 “선생님 혹시 치마를 즐겨 입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셨고, 의도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냥 솔직하게 “아니요. 즐겨 입지 않습니다” 라고 말씀드리자, 뜻밖에 “그거 참 잘됐네요. 신발은 되도록 편한걸로 신으세요.”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현장에서 근무하다보면 종종 도망갈 일이 생긴다는 것이었습니다. 팀장님의 첫인상을 떠올리자면, 일에만 몰두해있는 스마트한 전형적인 직장인 스타일이었습니다. 트레이드마크인 검은색 뿔테 안경이 그 이미지를 만드는데 한몫 했던 것 같습니다. 팀장님은 철두철미하고 완벽한 것을 좋아하지만, 직원들에게 사례와 관련하여 수퍼비전을 줄 때는 아이들을 위한 방향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치열하게 고민한 뒤 조언해주는 진지한 분 같았습니다. 팀장님과 아동학대 조사를 하며 함께 맞이한 모든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생각해보면 너무나 힘들었지만, 20대를 통틀어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신고접수를 받던 날, 떨리는 마음에 아이의 성명을 재차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신고자는 “귀머거리에요? 신고 취소 할랍니다” 하면서 확 끊어버렸지요. 어쩔 줄 몰라 사무실에서 울고 있는 저를 선임선생님들이 달래주며, 팀장님께 상황에 대해서 보고를 드렸습니다. 팀장님께서는 단숨에 신고자에게 전화를 하여 모든 상황을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조사를 할 때 “우리 상담원에게 귀머거리라고 한 것은 상당히 잘못된 언행인 것 같습니다” 라며 저의 마음을 위로해주셨지요.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이제 9년차에 접어들고 보니 ‘그게 쉽지는 않은 일인데, 정말 용기 있는 사람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날은 계모로부터 분리되고 싶다며 우는 아이를 달래 돈가스를 먹이고, 팀장님은 근처에 있는 아동보육시설에 전화를 돌리며 아동보호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받아주는 곳이 없어 추운 겨울날 돈가스 집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돈가스를 보면 그날의 날씨나, 아이의 이름, 식당의 위치까지도 생각이 납니다.또 어느 날에는 고등학교 남자아이의 상처를 함께 보듬어 주기도 했습니다.
몇 십 년 동안 떨어져 있었던 친엄마를 경찰의 협조로 찾아주며, 친엄마 앞에서 분노를 토해내면서 기관의 집기를 박살내는 아이를 혼내기는커녕 함께 마음 아파했습니다. 팀장님은 “애가 저러는 건 어른들이 전부 잘못 한 거에요. 지금은 무엇을 하던 어른들이 다 받아주고, 다 풀어주고 해야 마음에 분노가 안 쌓입니다.” 라며 어쩔 줄 몰라 당황하던 저를 안심시키기도 하셨지요.
어느 날은 큰 사건을 맡았는데, 긴급하게 아동의 분리를 요청하는 작업을 새벽까지 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팀장님께서는 새벽 2시까지 함께 퇴근하지 않으셨습니다.고요한 사무실에는 팀장님과 저, 이렇게 두 명이 남아 있었고 적막을 깨고 저의 컴퓨터 타자 소리만이 사무실에 맴돌았지요. ‘타닥 타닥’ 소리가 끝나고, 팀장님께 보고를 드렸습니다. “팀장님, 서류 다 했습니다. 봐주십시오” 어느덧 시계 바늘이 새벽 2시를 가르키고 있었습니다.
“와 선생님 벌써 다 한거에요?” 라며 그 많은 서류를 꼼꼼하게 봐주셨지요. 수고했다는 격려와 함께 다음날 출근을 위해 함께 퇴근을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이는 무사히 분리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아이에게 물어보니, 아이는 이렇게 대답해주었어요. “이제 안심이 되어요. 선생님.” 모든 피로가 없어지는 듯,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장님은 직장 상사이지만, 수퍼바이저로서, 멘토로서 모든 부분에서 저를 단단하게 만들어주신 분입니다. 때로는 팀장님의 스타일이 힘들고, 버겁고,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그것은 모두 저를 믿어서 였다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습니다.
사례에 대해 고민이 될 때, 방향을 잡지 못할 때, 팀장님께서는 항상 등대 같은 역할을 해주셨습니다.그래서 누군가 인생의 멘토를 꼽으라고 한다면, 팀장님을 꼽겠습니다. 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대, 지도자, 스승 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인생에 그런 사람과 잠시나마 인연이 될 수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팀장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사례를 대하는 자세, 그리고 사회복지사로서의 소명의식, 업무 스타일 모두 곁에서 바라보며 배울 수 있었음에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방향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도, “만약에 팀장님이라면 나한테 뭐라고 조언을 해주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고는 합니다. 덕분에 사례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지고, 시각 도 한층 넓어졌습니다.
기관에 있던 모든 분들이 저의 멘토이기도 했습니다. 선임선생님께서는 저에게 “선생님, 우리가 아이들의 수퍼맨이 되어주면 됩니다. 열심히 노력해주세요.” 라며 격려해주셨지요. 아마 그 말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사회복지사가 어떤 사람의 인생에 슈퍼맨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정말 즐겁고 행복한 일일 거라고, 꼭 그렇게 되어야겠다고, 아무에게도 꺼내놓지 못한 채 혼자 결심한 순간이었지요.
지금도 가끔 그 기억을 반추하며 그 때를 떠올립니다. 너무나도 힘들어서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너무나도 열심히 했었기에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했기에 다시금 떠올려 보고 싶은 시절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서로 현장을 떠나 다른 곳에서 근무를 하고 있지만, 치열했던 그때의 그 시절은 쉬이 지워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의 슈퍼맨을 자처하고 있을 수많은 사회복지사들을 응원하고, 위로하며... 이 글을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