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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생의 은인
  • ['내 인생 멘토, 멘티와의 소중한 이야기' 수기 | 202208ㅣ글 김현님ㅣ그림 김민정님]
태어날 때 의료사고로 뇌성마비 장애를 갖게 된 저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 1학기까지 어머니께서 업거나 제 등 뒤를 받치고 부축을 해주셔서 등하교를 했습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치지 않던 어머니의 정성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3학년 여름방학 때 저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같은 반 친구와 친해졌습니다. 이야기도 유독 잘 통하고 친해지자마자 각별해져 단짝이 되었지요.어린 나이에도 넓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그 친구는 그때부터 제 손을 잡고 부축하여 다른 친구들과 노는 곳에 데려가고 2학기 개학을 하자 자신이 저의 등하교를 맡아주겠다 하여 매일 아침 등교시간이면 저희 집으로 와서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식까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저의 등하교를 맡아주었던 그 친구였고 그런 배려에 그치지 않고 하교 후의 시간과 주말에도 거의 저와 함께 해주었습니다. 그 친구 덕분에 불편한 몸이었음에도 소풍과 수학여행, 운동회에도 갈 수 있었습니다.학교에서 배려해주어서 6학년까지 같은 반은 물론이고 내내 짝으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로 진학을 했을 때 당시, 울산의 중학교 진학은 추첨제로 진학하는 제도였음에도 교육청의 배려로 그 친구와 같은 중학교와 또 같은 반으로 진학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친구의 어머니께서도 훌륭한 마음을 가지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그 친구도 공부에 집중해야 할 시기인데 아들의 희생을 흔쾌히 허락해주신 그 마음은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도 변치 않는 감사함으로 지금도 제 마음에 자리하고 있습니다.중학교 3년을 그 친구의 희생과 사랑으로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제 키도 커지고 체중도 늘어나서 일일이 부축하기 힘들기도 했을 터인데 내색 한번 없이 꿋꿋하게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여전히 하교 후와 주말에도 함께 해주던 참 고마운 친구였고 든든한 그 친구 때문에 여러 다른 친구들과도 사춘기 시절을 원만하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울산의 고등학교는 비평준화 지역이었기에 그 친구와 저는 결국 다른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우리의 우정은 변함이 없었고 주말을 함께 하며 그 친구는 제 손을 잡고 부축해주어 나들이도 가고 함께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어쩌면 그처럼 희생적 일 수 있었을까 돌이켜 보며 인생도 돌아보게 됩니다
제가 대학을 서울로 오게 되며 울산에 남은 그 친구와는 잠시 떨어져 있던 시간이었으나 그 친구는 군대에 가서도 휴가 때가 되면 울산 집으로 내려가기 전에 꼭 저를 만나러 와주었습니다. 제대를 하고서도 인연은 계속 되었고 그 시기 울산의 한 회사에 임원이셨던 제 아버지의 배려로 그 친구는 회사에 입사를 했습니다. 그 친구가 직장인이 되어서 참으로 뿌듯했던 기억이 납니다.
얼마 후 그 친구는 결혼 했고 첫 딸을 데리고 저희 집에 인사를 왔을 때에도 너무나 뿌듯했던 마음이었습니다. 그처럼 세월을 지나며 제가 잘 되어서 그 친구의 희생과 사랑에 보답할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며 생각하고 열심히 살았지만 제게도 인생의 풍파란 것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사업을 해오며 엄청난 굴곡과 스트레스를 받으며 지내다 결국 사업을 잃어야 했습니다. 힘 있을 때는 잘 보이려 애쓰던 사람들도 다 떠나가고 악마처럼 괴롭히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 찾는 사람도 없이 전동휠체어에 몸을 맡기고 살아야 했습니다. 물론 당연 했겠지만 그럼에도 그 친구는 변치 않고 저를 찾아주고, 아니 더 많은 신경을 써주며 만날 때마다 생선회나 소고기 등 비싼 음식을 사주고 아낌없이 위로해주었습니다.그 마음이 참 고맙다고 구체적으로 표현은 않았지만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고마움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 제 아버지께서 작년 여름에 쓰러지셨습니다. 검진 결과 폐암과 뇌종양이셔서 수술을 하셨지만 곧 거동이 불편해지셨고, 저는 서울에 있고 더구나 몸도 불편하기에 마음만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모를 심경이었습니다. 아들로서 병석의 아버지께 아무 것도 해드릴 수 없다는 헛헛한 마음은 참 아팠습니다. 그 친구도 사실을 알게 되었고, 역시 그 친구였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 친구가 매일 아버지를 찾아서 극진하게 보살폈습니다. 제가 해야 했던 일인데 그 친구가 해주었습니다. 그 친구가 아들 노릇을 해주어서 그럼에도 아버지께서 덜 외롭게 투병 하셨다 생각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그 친구의 은혜로써...
그 친구에게 저는, 더 나이가 들면 네 가까이서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너에게 짐이 되고 싶진 않다고 자주 와보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까이 있으면 역시 제 몸처럼 저를 챙겨 줄 그 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저는 만약 가까이 살아도 무심한 척 하여 그 친구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씩씩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제가 더 힘든 모습을 보이거나 초라해 보이면 더 마음을 쓰고 희생하려 할 그 친구이기에 일과 가족에 충실하려면 아직은 그 친구 가까이 사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때가 되고 그 친구도 저도 더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 친구가 딸과 아들의 혼사를 다 치르고 나면, 11살 때부터 이어온 끈끈한 우정과 그 친구의 희생과 사랑에 대한 보답을 할 수 있는 날들을 위해, 같은 하늘 아래 가까이 있으면서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려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생의 은인. 마음 깊이 감사하는 마음. 세상 마지막 날까지 꼭 갚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