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주말 밤 텔레비전에서 여러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주인공이 쌍안경으로 멀리 있는 곳을 볼 때 화면에는 까만색 배경에 숫자 8을 옆으로 기울인 것처럼 구성되었다. 두 개의 렌즈로 어딘가를 바라보는 주인공 시점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갸우뚱 거릴 수밖에 없었다. 쌍안경을 들여다봐도 8이 아닌 0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인생을 통틀어 딱 한 번 자살을 생각해 봤다. 돌이켜보면 허무맹랑한 생각이었지만, 학년 초 매일 이어진 친구들의 놀림 속에서 멘탈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약해졌다. 격앙된 감정을 위로받거나 공유할 방법을 전혀 몰랐다. 하교 후 동네에서 길을 따라 큰 도로로 향했다. 커다란 사거리를 지나 터널을 두 번 빠져나가 한강 다리에 도착했다. 길게 뻗은 한강 다리가 주는 위화감에 압도당했다. 푸른색의 한강 물이 생각보다 빨리 흘러가고 있어 놀랐다. 뛰어내리려고 왔는데 도저히 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막상 그곳에 도착하니 집에는 어떻게 가야 하나 걱정이 들었다.
태어나 열 번째 맞은 봄날의 한강은 생각보다 몹시 추웠다
너무 일찍 철이 들었다. 삼 형제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조금 늦게 철이 들어도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선천성 녹내장이라는 병명으로 인해 오른쪽 눈에 시력을 잃은 채 세상과 마주했다. 부모님을 원망한 적은 없었다.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고, 원망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는 걸 일찍 알아차렸다. 어린 시절에는 크게 불편한 점은 없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왼쪽 눈보다 훨씬 큰 오른쪽 눈으로 인해 ‘짝눈’이란 별명을 갖게 되었다. 오른쪽 시야가 없었기에 공놀이 때 패스를 자주 못 받았다. 학년 초기 친구들이 놀리기를 반복했다. 고약하고 짓궂은 수준은 아니었지만, 신경이 쓰였고 거슬렸다. 그렇게 6학년에 이르렀다. 곧 중학생이 될 녀석들의 장난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어쩌면 그것은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캐릭터를 갖고 개그를 주고받는 수준 정도였다.
늦가을 체육 시간, 그날의 분위기는 예전 공 몇 개를 갖고 운동장에서 아무렇게나 뛰어놀던 때와 사뭇 달랐다. 2인 1조로 짝을 만들었고 눈을 가릴 수 있는 끈을 하나씩 받았다. 눈을 가린 사람이 운동장을 다니면 같은 조 친구가 위험하지 않게 말로만 도움을 줘야 했다. 눈을 가리자 세상이 깜깜했다. 환한 운동장에 내려앉은 햇살이 암흑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단 한 걸음도 내딛기 머뭇거려졌다. 짝을 지은 친구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들렸다.
10분이 지나 역할을 바꿨다. 느린 걸음으로 앞을 못 본 채 허공을 손으로 휘저으며 걷는 친구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도움을 주기 위해 꼼꼼하게 주변을 묘사했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평소보다 일찍 교실로 올라왔고, 선생님은 나를 앞으로 불렀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 그것을 체험하는 것, 이를 통해 조금이나마 다른 것을 이해하는 것들에 대해 차분하게 들려주셨다. 이어진 주제는 바로 나였다. 우리 반 모든 친구와는 다른 눈을 가진 내 신체적 결함을 직접적으로 다루셨다. 6년의 학교생활을 통틀어 그런 상황에 놓여본 적 없어 적잖게 당황했다. 그것은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선천성 녹내장이라는 병명과 시각 장애라는 단어도 함께 언급되었다.
안구 이식 수술과 더불어 시력을 되찾는 방법에 대해서도 가볍게 이어졌다. 나만큼 경직된 친구들의 표정과 관심 없고 지루하다는 듯 딴청을 부리는 행동이 번갈아 가며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지막 단 한마디의 말씀으로 경황없고 소란스럽던 그곳의 모든 혼란이 순식간에 차분하게 정리되었다.
“네가 가진 눈은 비록 세상을 반밖에 볼 순 없지만, 두 배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이란다.”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멀리로부터 종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해석이 놀라웠다. 묘하게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내가 가진 한계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선생님 말씀대로 정말 두 배 더 깊게 볼 수 있을 거란 허황한 기대를 품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들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은유와 진심에 매력을 느꼈다. 열세 살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까지 그 누구도 내가 가진 장애를 그렇게 바라봐주는 사람은 없었다.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이후 3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아닌 장애를 값진 보석처럼 만들어준 선생님은 졸업하는 그날까지도 내 건강과 올바른 생각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 꼼꼼하게 신경 써주셨다. 사춘기 시절 혼란스러운 경련을 진정시켜준 것도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졸업 후 두 번을 더 찾아뵙는 과정에서도 선생님은 내게 늘 한결같은 표정과 목소리, 그리고 말씀을 전해주셨다.
그때 선생님의 그 말 한마디는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주었고, 나를 늘 설레게 해주었다. 봄날의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푸른 들판을 힘껏 달려 내려오는 기분이라면 가장 적당할 것이다.
즐겁게 이어지는 감정들이 밀알이 되고 씨앗이 되었던 것일까. 습작에 지나지 않던 그림을 더 정성껏 그려 나갔다. 중학교 미술 선생님이 예술 고등학교 진학을 적극적으로 권장했지만 집안 사정으로 일찌감치 포기했을 뿐이다. 몇 줄 혹은 몇 장씩 끼적이던 글쓰기는 진로와 관계없이 꾸준히 이어나 갔다. 원하는 주제로 글을 마감할 때마다 느껴지는 기이한 쾌감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취미로 시작한 사진은 잠시나마 부업으로까지 즐겼다. 쌍안경과 달리 단 하나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진이야말로 내 장애와 가장 흡사한 장르가 아닐 수 없었다. 우연히 내가 찍은 사진들을 본 어느 사진작가는 외눈박이 내 눈이 모든 일상을 사진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화에 심취했고 음악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디자이너로도 밥벌이해나갔고, 20대 중반의 나이에 음악 잡지 편집장도 경험했다.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다 해보고 싶었던 20대는 온전히 그렇게 내 열정과 도전으로 빼곡히 채색했다.
두 아이의 아빠가 되는 과정속에서 내 장애가 유전되진 않을까 큰 걱정을 했다. 다행히 두 녀석 모두 건강하게 태어나주었고,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두 번째 인생을 살아가는 시간은 하루하루가 늘 소중하다.
보고 듣고 느끼며 경험한 모든 것들의 시작은 분명했다. 비록 매 순간 떠올리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가능성과 긍정적인 마음가짐은 여전히 초심에 기대고 있다. 아내와 아이들을 소중하게 진심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시선 또한 그 초심으로부터 이어져 있다고 믿는다.
나를 신뢰하는 방법을 그 말로부터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