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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더 행복해지는 시간
  • ['나의 나눔 실천 이야기' 수기 | 202307ㅣ글 서현정님ㅣ그림 김현주님]
어린 시절, 나는 불우했던 가정사로 인해 외롭고 어두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불행이란 녀석은 성인이 된 후에도 나를 놓아주지 않고 끈질기게 들러붙었다. 동업으로 함께 음식점을 운영하던 지인이 배신을 해 삶의 뿌리까지 흔들리게 된 것이다. 내 삶은 늘 어두웠고 빛이 들지 않았다. 왜 나만 이토록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우울증의 늪에 빠져들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벼랑 끝에 선 적도 있었다. 하루하루를 가까스로 버티던 어느 날, 우연히 가슴 따뜻한 사람을 만났다. 용기가 없었던 나는 진심으로 다가오는 그를 밀어내기만 했다. 그런데도 그는 내 손을 잡아 주었다. 결국 그를 믿고 가정을 이루면서 어둡기만 했던 내 삶에도 조금씩 빛이 스며들었다. 남편과 이룬 가정은 참으로 따스했다. 그 안에서 나는 이전에는 느낄 수 없던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첫 아이를 임신 몇 개월 만에 뱃속에서 잃고 말았다. 기회를 포착한 우울증이 또 다시 내 안에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한없이 슬프고 무기력했고, 또 어떤 날은 주변 무엇이든 베어낼 듯 날카롭게 마음이 벼려지곤 했다.
남편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었다. 우울증 정도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며 함께 극복해 보자고 격려했다. 나는 남편의 간곡한 권유로 정신과 상담을 받게 되었다. 한걸음 물러서서 나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하루는 담당 의사선생님이 타인을 돕는 이타적인 생활도 우울증과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말했다.
우울감이 다스려지지 않을 땐 선한 마음을 갖고 나눔 활동을 해보라고 조언해주었다. 선생님의 말이 와 닿지 않았던 나는 진료실을 빠져나오며 혼잣말로 되뇌었다. ‘나는 누군가를 도와줄 능력도, 여유도 없는데…. 내가 이렇게 힘든데 누굴 도와주라고.’ 나 자신도 감당하지 못하는 처지에 나눔을 실천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담당 의사선생님의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고 계속 맴돌았다. 그러다 문득 TV에서 어려운 이웃들을 돕기 위해 김장담그기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추운 겨울날, 건물 안이 아닌 밖에서 김장을 담그는데도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활기가 넘쳐났다. 순간 뿌옇던 머릿속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김장담그기 봉사활동을 해보자!’
오랜 시간 식당일을 해왔기에 김치를 담그는 일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또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로 봉사를 한다면 조금은 더 즐겁게, 자주 활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에게 김장담그기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얼마 후 집 근처 사회복지관에서 김장담그기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는 글을 보았다면서 정보를 찾아주었다. 봉사 당일, 김장을 담그기 위한 자원봉사자들이 속속 한자리에 모여들었다. 약 4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능숙하게 현수막과 작업대를 설치하고 김장을 준비했다. 채소를 다듬고 고춧가루를 버무리는 손이 얼마나 빠른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분들 틈에서 보조를 맞추려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나이 지긋한 자원봉사자 한 분이 내게 손이 빠르고 야무지다면서 칭찬을 해주었다. 나는 칭찬을 에너지 삼아 더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재료 준비를 마친 후에는 본격적인 김장담그기에 돌입했다. 자리를 잡은 우리는 절임배추 속을 양념소로 빠르게 채워나갔다. 자원봉사자들 모두 독거노인과 장애인 가구 등 어려운 이웃들에게 김치 한통이라도 더 전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나눔이기에 더 큰 충만감이 느껴졌다. 개개인의 작은 힘이 모여 큰 힘이 된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 순간이었다.
자원봉사자 중 누구하나 김장담그는 일을 대충하지 않았다. 내 가족이 먹을 김치를 담그는 것처럼 정성을 기울였고,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맡은 바 일을 척척 해냈다. 추운 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곳은 사람들의 열기로 훈훈했다. 장시간 서서 구부정한 자세로 일을 했지만, 모두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만은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느덧 1000포기의 김치가 먹음직스런 모습을 갖추게 됐다. 맛깔스러운 포기김치가 김치통 속에 차곡차곡 채워지는 모습을 보면서 충만감도 커졌다. 그렇게 김치를 김치통에 나눠 담는 것으로 김장담그기 봉사활동이 모두 끝났다. 그날 담근 김치는 곧바로 이웃들에게 보내졌다. 김치를 싣고 출발하는 배송차를 향해 어려운 이웃들이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함께 실어 보냈다. 뒷정리 후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었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김장을 하고 늦은 오후에 먹는 보쌈과 김치는 정말 꿀맛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자원봉사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내 또래의 주부 봉사자는 3년째 김장담그기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었고, 큰 언니뻘 되는 분은 친구를 따라 시작한 봉사활동이었는데 1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저마다 봉사활동을 시작한 계기나 해온 시간은 다르지만, 봉사를 자기 삶의 일부분으로 여기는 마음만큼은 모두 같았다.
김장담그기 봉사활동을 하고 온 날, 몸은 한없이 피곤한데도 신기할 만큼 불면증세 없이 편안히 잠잘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전에 없이 몸과 마음이 상쾌했다. 나를 짓누르던 무기력이나 짜증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 오후, 봉사활동에 참여했던 분으로부터 행사 사진을 전송받았다. 사진을 들여다본 순간 나의 낯선 모습에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진 속에서 내가 김장을 담그며 환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즐겁게 봉사활동을 했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날을 계기로 나는 꾸준히 김장담그기 봉사활동을 다녔고, 그곳에서 만난 또래 친구들과 소통하면서 인간관계를 넓혔다. 처음엔 무기력과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시작한 봉사활동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삶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아갔다. 친구들과 만나 함께 김장을 담그고, 봉사활동이 끝난 후에는 일상을 공유하면서 활력이 얻었다. 나는 봉사활동을 시작하면서 예전보다 훨씬 더 밝아지고 많이 웃게 됐다. 흐릿하게만 보였던 삶도 보다 선명해졌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우울증세도 완화되어 담당 의사선생님으로부터 더 이상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봉사나 나눔은 내가 무언가를 주는 활동이지만, 그로 인해 내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아름답고 의미 깊은 행위이다.
마음을 나눌 때마다 나는 더 행복한 사람이 되어갔다. 나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내 삶에 희망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나눔은 거창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싶다는 따듯한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임을 나 역시 봉사활동을 하며 알게 되었다. 앞으로도 나는 내가 가진 재능과 마음을 조금씩, 꾸준히 나누며 살아가고 싶다.